사평역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히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전형적인 간이역의 풍경은 아닐지 몰라도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를 보면
나의 뇌리 속에 스쳐 지나가는 간이역들의 모습이 굉장히 자연스럽게 오버랩된다.
밤열차를 타고 이동했던 기억,
대합실 내의 톱밥난로는 지금의 나에게는 다소 어색한 존재일지는 몰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은 왜일까.
곽재구 시인의 터전은 광주.
"사평역에서" 또한 그의 터전과 무관하지 않다.
시의 모티브가 된 "사평역"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기차역이다.
(이번에 새로 개통되는 서울지하철 9호선을 보면 고속터미널 역 바로 다음 역 이름이 사평역이긴 하다.)
경전선 철도 광주 남쪽에 있는 "남평역"
광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간이역이다.
지금까지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 "사평역"의 모티브가 된 곳이 바로 이곳. "남평역"이라고 한다.
시 속의 풍광에 녹아들고 싶었다.
광양의 진상역에서 14시 5분경에 출발한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순천역에 14시 30분경 도착. 다시 14시 50분에 출발하는 목포행 열차를 타고
두시간여 이동....순천-벌교-보성-화순을 거쳐
16시 45분경, 남평역에 내렸다.
적막한 간이역.
타는 사람은 없었고, 내린 사람도 나 혼자.
남평역은 작은 식물원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다양한 조경수가 심어져 있었다. 작은 숲 속에 자리한 역처럼..
남평역은 아침, 저녁으로 상, 하행 1편씩, 왕복 4편의 열차만 운행된다. 열차를 타고 남평역에 오기에는 힘든 편.
톱밥 난로가 있어야 할 대합실 내에는 소파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좁은 대합실 공간이지만 방문객에 대한 배려가 보인다.
전형적인 40~50년대 건물의 모습을 보여주는 남평역사. 이렇게 인적 드문 기차역에서 밤기차를 오돌오돌 떨면서 기다리는 광경은 그리 어색해보이지는 않는다.
한가지 반전을 이야기하자면,
시와 분위기가 거의 맞아떨어져가 보이는 남평역은
사실, "사평역"이 아니라고 한다.
곽재구 시인의 고향과 가까운, 시골 기차역. 사평역과 이름이 비슷한 기차역. 어쩌다 보니 역 풍광도 시 속 풍광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남평역은 사평역이 되었다고 한다.
곽재구 시인의 말을 빌자면
"사평역"의 모티브는 남평역이 아니라 광주 시내에 있었던 "남광주역"이라고 한다.
남광주역은 광주역에서 남쪽으로 한정거장 다음에 위치한 기차역으로 주변에 남광주시장이 있고, 남광주시장으로 인하여 멀리서 장을 보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고 하는 곳이다.
경전선 철도가 광주 시내를 가로질러 놓여 있어 도시 발전에 저해가 된다고 하여
경전선 철도는 송정리역에서 효천역 사이 구간을 시 외곽으로 이설하였고
시내에 있던 남광주역은 2000년 8월 10일 새벽 0시 13분,목포발 부전행 324호 무궁화호 열차를 마지막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남평역에서 40분 정도 남평읍내로 걸어 나왔다.
남평읍내에서는 광주로 가는 시내버스가 자주 있는데, 180번 시내버스를 타고 광주 백운광장에 도착하니 18시 30분경. 해가 뉘엇뉘엇 져가는 때였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남광주역 터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남광주역은 조선대학교 인근에 위치해 있고, 현재는 주차장으로 바뀌었다. 이곳이 예전에 철도가 다녔던 흔적이라고 알려주는 폐선로, 폐교각, 역명판 등등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남광주역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남아 버스정류장 이름, 지하철역 이름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진주에서 하동, 광양을 거쳐 광주까지.
하루만에 다닌 여정 치고는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벚꽃과 함께 봄을 느낄 수 있었고,
시 속에 빠져들어 옛 정취를 느낄 수도 있었다.
비록, 시 속의 배경은 없어졌지만, 그와 비슷한 풍경 속에서 위안을 삼아 본다.
4월이다.
여행 다니기 좋은 시기.
이제 좀 다녀 볼까.